제9장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눈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그녀는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눈앞의 작은 여자아이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남자는 이도준이었고, 그 작은 여자아이는 자신의 딸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유리는 이도준의 손길을 거부하며 밀쳐냈고, 동그란 눈으로 이도준을 쏘아보았다.
유리의 눈에 이도준은 엄마를 빼앗아 가고 엄마를 슬프게 한 나쁜 아빠일 뿐이었다. 스스로 일어날 수 있으니, 그의 부축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도준이 밀쳐지는 것을 본 윤명주가 유리 앞에 쪼그려 앉아 못마땅한 듯 말했다. “얘야, 아저씨가 일으켜 주는데 어떻게 아저씨를 밀어낼 수가 있니? 고맙다고 해야지, 알겠어?”
유리는 고개를 들어 이도준을 쳐다보고, 다시 윤명주를 쳐다보았다. 틀림없었다. 오빠가 말했던 나쁜 아빠 옆에 있는 바로 그 나쁜 여자였다!
“아줌마는 누군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해요? 으앙…….” 유리가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윤명주는 유리가 우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씰룩였다. “얘야, 왜 우는 거니, 내가…….”
“으앙…… 아줌마가 나 괴롭혔어. 나한테 막 뭐라고 했어, 으앙…….” 이 나이대 아이들에게 억지를 부리며 떼를 쓰는 것은 필살기나 다름없었다. 하물며 유리처럼 희고 보드라운 피부에 복덩이 인형처럼 사랑스러운 아이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유리가 큰 소리로 울자, 주위 사람들은 여자아이가 저렇게 우는 것을 보고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다가와 달래기 시작했다.
박희수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다가 유리가 우는 소리를 듣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서는 순간 모든 게 들통날 것이다.
“아이고, 애기가 왜 그러니? 왜 이렇게 서럽게 울어, 누가 괴롭혔어?” 옆에 있던 행인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얘야, 울지 마. 우는 거 보니까 할머니 마음이 찢어지네. 할머니한테 말해봐, 누가 괴롭혔어?”
구경꾼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유리는 애처롭게 눈물을 훔치며 한 아주머니의 품에 숨어, 두려운 눈으로 윤명주와 이도준을 쳐다보았다.
윤명주는 영문도 모른 채 쏟아지는 주변의 비난 어린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유리를 잡아끌며 다급한 마음에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얘야,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아줌마가 언제 널 괴롭혔다고 그래?”
윤명주가 잡아당기는 바람에 유리는 앞으로 비틀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든 채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작은 얼굴이 온통 새빨개졌고, 눈물은 돈이라도 안 받는 것처럼 뚝뚝 떨어졌다.
“아니, 이 사람이 정말 왜 이래? 말로 하면 되지, 어떻게 애한테 손을 대?” 옆에 있던 할머니가 마음 아파하며 유리를 안아 일으키고는 윤명주를 엄하게 다그쳤다.
“그러게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저렇게 작은 애한테 손찌검을 한담. 뻔뻔하기도 하지.”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겨서 마음씨는 고약하기 짝이 없네.”
이도준은 눈물범벅이 된 작은 아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만한 아이가 이렇게 우는 것에 그 역시 어쩔 줄 몰랐다.
“저,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냥 한번 잡아주려고 한 건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윤명주는 해명하려 애썼지만, 변명할수록 더 궁지에 몰렸다. 누가 이 아이가 살짝 건드렸다고 이렇게까지 울 줄 알았겠는가. 이건 명백히 자해 공갈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할머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큰 소리로 울던 유리는 뒤에 있는 엄마를 보고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다.
흥! 이게 바로 나쁜 여자가 엄마를 괴롭힌 대가다.
박희수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유리는 대체 누굴 닮았는지, 저 연기력이며 저 영악함은 박희수마저 속아 넘어갈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만.” 이도준이 할머니 품에 안겨 있던 유리를 번쩍 들어 자기 품에 안았다.
박희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이도준이 유리를 알아볼까 봐 그의 표정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유리는 이도준의 품에서 작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발버둥 쳤다.
“이름이 뭐지?” 이도준은 유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첫눈에 이 아이의 눈매가 그 여자와 어딘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 작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앙칼진 모습은 더욱더 그녀를 빼닮았다.
게다가 아이는 방금 화장실에서 나왔고, 그 여자도 방금 화장실에 갔었다. 너무 공교로웠다.
“이거 놔요! 나 아저씨 몰라요! 놔요, 놓으란 말이에요! 아저씨 같은 사람 모르니까 이름 안 알려 줄 거야!” 유리는 작은 짐승처럼 이도준의 품에서 몸부림쳤다.
행인들이 나서서 말리려 했지만, 이 남자가 풍기는 위압적인 기세에 물러서고 말았다.
박희수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올랐고, 끝없는 공포가 마음속으로 밀려들었다.
알아챈 건가?
그가 알아챈 건가?
“박희수 씨.” 이도준이 그녀를 불렀다. “이리 와보시죠.”
남자의 목소리에 박희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자 깊은 연못처럼 유심한 남자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남자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그의 목소리에 박희수는 억지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박희수는 억지로 자신을 진정시키며 태연하게 남자 앞으로 걸어가, 그의 차가운 눈빛을 똑바로 마주했다. “무슨 일이시죠?”
“거기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이도준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아 어떤 이상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박희수에게 꽂힌 그의 시선은 시시각각 그녀의 감정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유리는 박희수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유리의 이 미세한 반응은 이도준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박희수는 숨을 살짝 멈췄다. 양옆으로 늘어뜨린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도준 씨, 두 분 다 정말 너무하시네요. 이렇게 작은 애를 괴롭히다니요.”
“눈이 빨개졌던데, 무슨 일입니까? 마음이라도 아픈가요?”
“이 대표님, 참 재밌는 말씀이시네요.” 박희수가 차갑게 비웃었다. “제 아이도 아닌데 제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요. 그냥 보다 못해서 그런 거죠.”
말을 마친 박희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유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정말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사실 박희수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뛰어오른 상태였다. 자신을 뜯어보는 남자의 시선 아래, 박희수는 자신이 투명 인간이 된 것 같아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의 앞에서 잔꾀를 부리는 것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 이빨을 뽑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그가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알 수 없었다.
“유리야.”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황급히 달려왔다.
최아라였다.
아니, 구세주였다!
최아라는 박희수를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 지나가 이도준 앞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유리를 보며 말했다. “유리야, 여긴 어떻게 왔어. 엄마가 얼마나 걱했는지 몰라.”
